책의 제목은 단순 생활자이다. 저자는 개발자였지만,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을 따라 다시 한번 발을 내딛는다. 이 책은 단순한 삶을 통한 마음의 회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마음을 따라 찾아간 곳에서 발견한 작가 자신의 모습을 담백하게 담아낸 책으로 느껴진다. 이 책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을 따라 찾아간 곳은 어떨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도서소개
잘 쉬지 못해 삶이 꺾이는 것을 경험한 작가는, 탐구 끝에 잘 쉬는 것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작가에게 휴식은 비어 있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비어있는 시간에는 나만 들어갈 수 있으며, 사회적 시선, 압박, 불안, 걱정, 두려움은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이 안에 있을 땐 혼자이고 자유롭다고 느끼는 감각이 필요했다. 단 한 시간, 단 하루라도 가벼운 상태가 되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걱정과 시름을 내일로 넘기고 있자면 내 안에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단순 생활자에서는 작가가 잘 쉬고 잘 살기 위해 차근차근 삶을 다듬어가는 과정이 숨김없이 담겨 있다.
저자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LG전자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일했다. 몇 번의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면서도 매일 읽고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다.
도서요약
1. 마침표 이후에 오는 문장
회사에 다닌 1년 반 동안 내가 가장 하고 싶던 건, 아침 9시에 글을 쓰는 일이었다. 회사 그만둘까 봐. 휴대폰에 대고 나는 말했다. 휴대폰 너머의 친구들은 누구 하나 나를 뜯어 말리지 않았다. 친구들은 내 속을 들여다본 사람처럼 그래 참 잘 생각했다며 나의 퇴사를 미리 축하해주었다. 어차피 친구도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을 거였다. 결국은 내 마음 가는 대로 내 삶이 흘러가게 되리라는 걸.
30대를 몽땅 글 쓰는 삶에 쏟아붓고 나서야 나는 글로 먹고사는 일의 요원함을 이해했다. 뒤늦게 현실을 너무나 제대로 직시한 통에 몇 번은 자다가 헉 소리를 내며 깨기도 했다. 2021년 1월 1일은 내 인생 최악의 날로 꼽을 만하다. 무슨 일이 생기지도 않았고 어디 아픈 데도 없는데 마음을 앓으며 처음으로 밤을 지새운 날이기 때문이다. 밤을 꼬박 새우며 나는 마침내 인정해야 했다. 이젠 허울 좋은 전업작가 생활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고, 좋았던 한 시절이 끝난 것이다.
그렇게 다시 직장인이 되었다. 첫 월급이 통장에 찍힌 날, 나는 좀 허탈해서 웃었다. 수천 권의 책을 팔아야 받을 수 있는 인세가 거기 찍혀 있었다. 회사에 다니기 시작한 무렵 나는 몇 년 전에 쓴 소설을 공모전에 출품했다. 몇 개월 후 회사에 앉아 있다가 수상작이 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란 제목으로 전자책이 출간되었고, 다음 해인 2022년 1월엔 종이책이 출간되었다.
종이책 출간 이후, 마침표를 힐긋거리며 보내는 시간이 늘어갔다. 자꾸만 마침표 이전의 삶을 떠올리게 됐다. 또 헉 하면서 일어나려고? 그만, 스톱, 생각 그만. 그렇게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몇 개월을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회사에 사직 의사를 밝혔다.
마침표를 찍었을 때의 마음을 기억하고 있다. 부단히 했던 노력도 만족할 만한 성취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이기 위해 무진 애를 쓰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유머를 잃지 않으려고 매일 마음을 다스리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또 살고 싶었다. 불안하지만 충만했던 그때처럼.
2. 독립의 즐거움
드디어 혼자 살게 되었다. 20대 중반부터 바라던 독립이 서른 넘어 시작된 ‘삶을 향한 여정(이제부턴 누가 뭐라 하든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겠다며 작가가 되었고,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사실상 기나긴 백수의 삶으로 돌입하게 된 여정)으로 가로막힌 바람에, 마흔이 넘어서야 수천 권의 인세에 버금가는 월급 수령에 힘입어 독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삶을 향한 여정이 헛되지 않았다는 듯 뜻밖에 소설가로 데뷔하게 되면서 공원 뷰까지 얻게 되었다.
K-나이별 퀘스트 깨기에 둔감한 편이라, 이 나이엔 이걸 해야 해, 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살아오진 않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주어지는 퀘스트이고, 마지막 퀘스트까지 무사히 깬들 행복할까. 그럼에도 마흔쯤 되면 홀로(독), 서야(립) 한다는 생각은 오래도록 해왔다. 나 혼자만의 퀘스트라고 볼 수 있었다. 마흔이 되면 모든 형태의 홀로서기에 익숙해지고, 때론 버겁더라도 감당하고 또 때론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아쉬움이 이것뿐일까. 혼자 살고 싶다는 건 좀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뜻이다. 9시면 잘 준비를 하는 부모와 산다는 건 밤에 편의점에 가는 것도 하나의 사건이 된다는 말이다. 밤에 영화를 보다가 맥주가 당길 때 편의점에 가는 일이 누군가의 걱정을 사는 일이 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드디어 이뤘다. 기쁘게도.
혼자 살게 되니 예상했듯 나의 덜 자란 부분들이 일상에 우수수 떨어졌다. 주로 살림에 관한 것들이었다.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내 방 하나, 내 몸 하나 건사하던 삶에서 더 넓고 많은 것을 건사하는 삶으로 넘어온 것이다. 그런데 넘어오고 보니,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처음엔 복잡해 보이던 것도 알고 나면 간단한 것들이었다. 건사 방법을 아니 머리가 아닌 몸을 쓰며 차례대로 건사하면 됐다. 어차피 내 일이라 생각하면 크게 귀찮지도 않았다. 독립하고 보니 나는 생각보다 더 독립에 적합한 인간이었다.
자기 전까지 두세 시간. 내가 만든 분위기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만 하다가 잘 수 있다는 이 소소하면서도 커다란 만족. 낮은 조도의 조명 아래에서 움직이다 보면 마음속 어딘가에서 불현듯 벅찬 감정이 몰려온다. 이런 게 행복일까. 그렇다면 나의 행복은 나의 시간과 공간이 나의 느슨한 통제하에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 듯하다. 독립하길 잘했다.
3. 내가 밤에 먹는 것
독립을 한다고 해서 어떤 떠들썩한 자유를 원하진 않았다. 남들에겐 자유 같아 보이지도 않는, 내가 자유라 해야 남들도 힐긋 찰나적 관심이라도 가져줄 자유. 나는 고작 이런 자유를 꿈꿨다. 그러니까 자정에 라면을 끓여 먹는 일 같은. 예전 같으면 가족을 깨우기 싫어 주린 배를 부여잡는 쪽을 택하고 말았을 테지만, 이젠 그럴 필요 없이 당당히 침대를 박차고 나오는 일 같은. 발소리 하나하나가, 라면을 꺼내고 봉지를 뜯고 수프를 찢는 소리 하나하나가, 냄비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를 켜는 소리 하나 하나가 우레와 같은 소음으로 집 안에 울려 퍼질 것을 우려해 도둑처럼 움직일 필요 없이 더없이 자유롭게 마음껏 소리를 내는 일 같은.
라면 면발을 다 먹고 국물을 반 정도 호로록거리고 나니 15분이 지나 있었다. 순간 이게 뭐라고 이토록 경건한 마음으로 임했나 싶었다. 평생을 주야장천 먹은 라면이면서. 그래도 오늘 먹은 라면은 분명 다른 라면이었다. 자정의 라면이었고, 당당한 라면이었고, 눈치 보지 않는 라면이었으며, 마음이 이끄는 라면이었고, 무신경한 라면이었다. 절제하지 않은 라면이었고, 선택할 수 있는 라면이었으며, 무엇보다 한 번쯤은 해보고 싶은 라면이었다.
4. 혼자 여행을 해야 한다면
제주도를 한 달 혼자 여행한 적이 있다. 여행의 끝자락엔 처음으로 10킬로미터를 달려봤고 여행을 다녀와선 마라톤 대회에서 10킬로미터 완주도 했다. 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많이 한, 잊을 수 없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제주도 한 달 여행 후 나는 다신 혼자 여행을 하지 않았다. 그 여행이 내게 알려준 건, 나는 혼자 하는 여행이 그리 맞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었기에. 낯선 환경이 주는 설렘보단 불안함이 더 크게 작용한다. 여행을 해야 한다면 혼자 하는 여행보다 함께 하는 여행을 하고 싶다. 낯선 환경에 불안해질 때 낯익은 눈이 내 눈을 바라봐줄 수 있도록. 여행지의 모든 것이 낯설어도 하나만큼은 낯설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만약 동행 없이 낯선 곳으로 가야 한다면 나는 기어코 그곳을 낯익게 만들어버리고 싶다. 매일 낯선 거리를 찾아 나서는 대신, 낯선 거리를 가고 또 가서 낯익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어느 외국 도시로 긴 여행을 떠나야 한다면 한곳에 머물며 같은 골목을 매일 걸어 다니고 싶다. 이왕이면 단골 식당, 단골 카페도 만들면서. 불안이 서서히 걷혀 그곳을 설레하며 바라볼 수 있도록.
5. 치타델레
온종일 휴대폰 속 다른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다 보면, 내 안으로 그들의 생각과 욕망이 쉽게 침투해온다. 어느덧 나는 그들이 욕망하는 걸 욕망하고, 그들이 말하는 걸 말하고, 그들의 의견을 내 다음번 의견으로 쓰기 위해 기억해둔다. 안 그러려 해도 자꾸 나를 잃어간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는 몽테뉴를 떠올린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몽테뉴 평전 『위로하는 정신』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서른여덟 살에 몽테뉴는 세상에서 물러나서 자기 자신 말고는 다른 누구도 섬기지 않게 되었다.”
서른여덟 살에 세상에서 물러난 몽테뉴가 숨어 들어간 곳은 그만의 서재, 치타델레. 아버지에게서 성을 물려받은 몽테뉴는 성 안 가장 쓸모없는 공간을 골라 그곳을 자기만의 서재로 삼는다. 나선형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나오는 그곳에서 그는 책 읽고 공상하고 글 쓰고 잠을 잤다. 몽테뉴의 허락이 없으면 아무도 그곳에 발을 들이지 못했고, 그는 원할 때만 치타델레를 벗어났다.
치타델레는 작업실 같은 개념이 아니었다. ‘외부 세계와의 작별을 의미했다. 몽테뉴는 실제 마흔여덟 살이 될 때까지 10년 동안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치타델레에서 홀로 보낸다. 그곳에서 오직 자기 자신만을 탐구했다.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치타델레란, 괴테가 말한 “내적인 자아, 아무도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자아”를 뜻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 나도 나에게 집중한다. 내 생각, 감정, 느낌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것을 바라본다. 그럴 때면 가늘고 연약하지만 그 끝은 내게 닿아 있는 이야기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나로부터 비롯된 이야기들이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조심스레 당겨 나에게 들려준다. 나의 치타델레에서, 나는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