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왜 불가능할까? 정보 기반 사회의 긍정적 측면에 숨겨진 어두운 면을 파헤쳐봅니다. 왜 우리는 끊임없이 정보에 노출되고 소비해야 하는가?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정보 기반 사회의 본질을 이해하고, 진정한 자유를 위한 길을 모색합니다.
도서소개
이 책의 제목은 저자 한병철이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벌인 논쟁(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난 2011년 월가 점령 시위 3년이 지난 시점)을 소개한 첫 번째 글에서 따왔다(원제는 ‘자본주의와 죽음 충동Kapitalismus und Todestrieb’). ‘공산주의 혁명가’를 자처하는 네그리는 “신자유주의 지배 체제에 맞선 지구적 저항의 가능성들을 열망”하면서 “다중(연결망을 이룬 저항 및 혁명 군중)”이 등장할 것이라고 믿지만, 저자가 보기에는 “순박한” 주장이다. 과거 “산업 사회의 체제 유지 권력”이 억압적이었다면, 오늘날 신자유주의에서 자행되는 권력은 ‘유혹적’이다. 과거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적인 착취가 저항과 반발”을 일으켰다면,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를 자유로운 경영자로, 자기 자신을 부리는 경영자로 만든다.” 손님에 대한 환대와 친절마저 평점을 매기고 경제화하는 세상에서, “프라이마크(유럽의 페스트패션 브랜드)가 동네에 들어서면 내 삶이 완벽해질 거야”라고 소녀들이 환호하는 세상에서 ‘혁명’이라니 저자의 눈에는 가당치도 않다.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상품으로 판매하는 순간, 자본주의는 완성에 이른다. 상품으로서의 공산주의야말로 혁명의 종말이다.” 그러니까 이 제목은 철 지난 이론에 기대어 디지털 자본주의의 영리한 통치 기술을 간파하는 데 실패한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와 존엄’을 잃어가면서도 어떤 저항감이나 비판 의식도 품지 못하는 무감각한 우리 세태를 동시에 겨냥한다.
작가소개
1959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했고,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서 철학, 독일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베를린예술대학교 철학·문화학 교수를 지냈다. 전 유럽과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피로사회》를 비롯하여 《정보의 지배》 《사물의 소멸》 《리추얼의 종말》 《고통 없는 사회》 《폭력의 위상학》 《땅의 예찬》 《투명사회》 《심리정치》 《타자의 추방》 《시간의 향기》 《에로스의 종말》 《아름다움의 구원》 《선불교의 철학》 《권력이란 무엇인가》 《죽음과 타자성》 《서사의 위기》 등 예리하고 독창적인 사회 비평서와 철학책을 썼다. 한병철의 연구 분야는 현대 사회의 병리학과 권력 분석입니다. 그는 특히 정보 기반 사회의 긍정적인 측면에 숨겨진 어두운 면에 주목하며,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위협하는 요소들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한병철은 독창적인 개념과 날카로운 분석으로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한병철의 철학은 현대 사회를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지적 도구를 제공합니다. 그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의 구조와 가치관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촉구하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줄거리
신자유주의 지배 체제는 왜 이토록 안정적일까? 그 체제에 맞선 저항은 왜 이토록 적을까? 왜 저항들은 모두 이토록 빠르게 물거품으로 돌아갈까? 부자와 빈자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혁명은 어찌하여 더는 불가능할까? 설명을 위해서는 오늘날 권력과 지배가 작동하는 방식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새로운 지배체제를 정착시키려는 자는 저항을 제거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지배 체제를 도입하려면 설정 권력(setzende Macht) 즉, 새로운 제도 등을 창시하는 권력이 필수적이며, 그 권력은 흔히 폭력과 짝을 이룬다. 그러나 이 설정 권력은 체제를 내적으로 안정화하는 권력과 동일하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마거릿 대처는 신 자유주주의 선봉으로서 노동조합을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고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의제를 관철하기 위한 폭력적 개입은 방금 언급한 체제 유지 권력의 일이 아니다. 규율 및 산업 사회의 체제 유지 권력은 억압적이었다. 공장 노동자는 공장 소유자에게 야만적으로 착취당했다.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적인 타자 착취는 저항과 반발을 일으켰다. 이 경우에는 지배적 생산관계를 뒤엎을 혁명이 가능했다. 이런 억압 체제에서는 억압도 억압자도 눈에 띈다. 구체적인 상대가 있고, 저항해야 할 가시적인 적이 있다. 신자유주의 지배 체제는 구조가 전혀 다르다. 이 체제에서 체제 유지 권력은 더는 억압적이지 않고 유혹적이다. 그 권력은 규율 체제에서처럼 확연히 눈에 띄지 않는다. 구체적인 상대도 자유를 억압하는 적도, 맞서 저항하는 것이 가능한 적도 더는 없다. 신자유주의는 억압당하는 노동자를 자유로운 경영자로, 자기 자신을 부리는 경영자로 만든다. 지금은 누구나 경영자인 자신에게 고용되어 자신을 착취하는 노동자다. 누구나 주인인 동시에 노예다. 계급투쟁도 자신과의 내적 투쟁으로 바뀐다. 오늘날 실패하는 사람은 자책하고 부끄러워한다. 사람들은 사회를 문제시하는 대신에 자신을 문제시한다. 연결망을 이뤄 협동하는 다중, 지구적인 저항 및 혁명 군중으로 봉기할 만한 다중은 오늘날 없다. 오히려 현재 생산방식의 핵심 특징은 제각각 고립되어 개별화된 자기 경영자의 외로움이다. 과거에는 기업들이 서로 경쟁했다. 반면에 기업 내부에서는 연대가 가능했다. 지금은 모든 각자가 모든 각자를 상대로 경쟁한다. 기업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절대적 경쟁은 생산성을 엄청나게 높이지만 연대와 공동체 정신을 파괴한다. 소진되고 우울하고 개별화된 개인들은 혁명 군중을 이루지 못한다.